#여성의날 #EVE #연구원일지
오늘은 여성의 날입니다.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해 투쟁했던
과거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죠.
저는 EVE의 2년 차 여성 연구원 M입니다. 여성의 생식건강 증진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섹슈얼
헬스케어 회사에 재직 중이죠. 회사에서의 업무는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이었습니다. 입사 후 매일매일이 여성의 날로 느껴졌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들을
여러분께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글재주도 없고 누군가에게는 큰일로 다가오지 않는 소소한 일상일 수 있지만
여성의 날을 기념해 용기 내 적어봅니다.
여성 생식기에 들어감에도 관리를 받지 않는
콘돔은 의료기기에 해당하기에 각종 내구성 테스트와 안전성을 검토하게끔 하는 것이 식약처의 법령입니다. 그러나 성 윤활제(러브젤)은
아직까지도 화장품으로 분류됩니다. 화장품은 사전 검토가 아닌 사후관리의 대상이기 때문에 사실상 안전성에 대한 관리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생식기에 직접 닿는 제품, 특히 여성의 생식기 내에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제품이 속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관리 체계이죠.
EVE는 생식기에 닿는 모든
것은 건강해야 한다는 미션을 품고 있기에, 저희 팀은 러브젤이 화장품 품목이 아닌 의약품/의약외품/의료기기 와 같이 안전성에 대해 더욱 엄격한 관리를 받는
품목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식약처에 끊임없이 전달했습니다. 하루의 일과의 시작과 끝이 식약처에 메일을
보내고 또 전화를 거는 업무로 꽉 차있던 날도 있었어요.
하지만 식약처는 의약품으로 보고 있다는 공식 답변과 달리 어떤 자료를 제출해야 하는지, 기준은
어떠한지, 허용되는 원료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 모르쇠로 일축했습니다.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더욱 나은 제품을 만들기
위한 기준을 담당관조차 모른다는 것이 저는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전화로는 좀처럼 명확한 답변을 받을 수 없어 식약처에 엄청난 양의 민원을 넣었더니, 올해 1월 드디어 민원 취하하고 방문 상담하러 오라는 회신을 받았습니다. 직접
작성한 시험 프로토콜은 물론 미국 FDA와 EU EMA 등의
안전성 자료를 10부씩 뽑아 손에 안고, 팀원들과 함께 오송역으로
출발했습니다.
저는 내심 담당자가 여성이길 바랐습니다. 생식건강에 대한 공감을 조금이라도 더
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먼 여정 끝에 식약처 본처에 도착한 우리는 상담 구역에
자리를 잡고, 떨리는 마음으로 드디어 담당자를 만났습니다. 여성
한 분과 남성 한 분. 여성 담당관이 있어 그래도 좀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와 함께 상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식약처에서 나온 담당관들은 전 세계에서 찾아온 안전성에 대한 기준과 의료기기 분류의 당위에 대한 서류를 대강
훑어봤고, 뒷면은 보지도 않았습니다. 제품의 취지와
안전성 확보의 필요성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했지만 별 관심이 없었죠. 몇달에 걸쳐 확보한 자료들은 딱딱하고
서늘한 시선 앞에 무력했습니다.
상심한 마음으로 올갱이 해장국을 먹은 채 서울로 돌아왔던 그날의 씁쓸함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10개 중 1개꼴인 여성 생식기 관련 논문
인체에 그 어떤 부정적 영향도 주지 않는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제조업 연구가에게 있어 꿈같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꿈같은 일을 우리 연구팀은 해 나가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러려면 당연히 많은 연구조사와 자료 검색이
동반되는데 그 과정이 참 쉽지 않습니다.
입사 첫날, 열의에 가득 차 윤활제가 질 점막 세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기 위해 구글 학술 검색에 'human vagina'를 검색해봤습니다. 총 검색 결과 양이 255000개. 그중에서도 찾고 싶었던 질 점막 세포 독성에 관련한 자료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루께 가 걸려 검색을 해도 원하는 결과를 찾을 수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human sperm'을
쳐보니, 검색량이 거의 10배에 달하는 2,010,000개가 화면에 뜨더군요. 여성의 생식건강에 관해
얼마나 많은 연구가 등한시되고 있는가를 절감했습니다. 옆을 돌아보니 같은 심정으로 절망 중인
동료가 보이더라고요. 어딘가 모를 허탈함 한 스푼, 끈끈한
동지애 한 스푼을 퍼먹은 기분으로 제 첫 입사 날이 지나갔습니다.
건강하고 안전할 권리를 위해
“세계에서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자료도 없고, 이상도
없다”
“A가 문제없으니 B 역시 문제가 없지 않겠냐”
“그 문제는 다른 담당자의 관할이다. 나는 전혀 모르겠다”
외부에서, 정부 기관에서, 전문 허가기관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하도 이런 말을 많이 들으니 어쩔 때는 제가 정말 유난인 건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이 연구 과제가 중요치 않아서일까? 생리라는 것을 숨기고 감추는
문화 때문일까? 의사결정자나 의사가 남성에 편중되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연구 비용이 너무 커서일까?
하지만 충분히 중요해 보이고 관심사가 될 만한 것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가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인체 안전에 관련한 기준을 '모르겠다'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포기했다'라는
말로밖에 저는 들리지 않습니다. 더 많은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며 저는 이를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2년 차인 지금도 눈에
띄게 변한 건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대답 속에서 알 권리에 대해 노력 중입니다. 뿌듯한 나날도 있었습니다. 내가 만든 안전성 프로토콜로 그 어느
회사에서도 하지 않던 성 윤활제의 접촉성 피부염 등의 시험을 진행하게 된 것. 그날의 즐거움은 아직도
이 회사에서 일하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 윤활제'라는
말을 꺼낼 때마다 외면받았던 것들이 생채기로 남았지만, 나와 같이 또 누군가는 이런 생각 갖고 부딪치고
있겠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습니다.
오늘은 여성의 날입니다. 여성의 권리 증진을 위해 투쟁했던
과거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죠.
저와 같이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다양한 여성들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내고 싶습니다. 지난해보다
더 나은, 더 안전한 오늘과 그보다 더 안전한 내년을 맞이하기 위해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Instinctus Co., Ltd.
글쓴이가 의도한 남성의 생식기를 지칭하는 의학 용어는 Penis 입니다. 단순 논문의 갯수로 연구가 많이 되었다라고 판단하는 것에도 많은 무리가 있지만, human penis라고 검색해서 나오는 결과와 human vagina라고 검색해서 검색해서 나오는 결과를 비교해야 그나마 좀 더 타당한 비교가 될 것 같네요.